책소개
극작가로서 현대 독일 문학계에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하이너 뮐러(Heiner Müller, 1929~1995)는 극작품뿐만 아니라 많은 시와 산문을 남겼다. 그러나 그의 시와 산문은 너무도 뚜렷하게 드러난 극작품의 비중에 비해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 그 주된 이유는 그의 시와 산문들 중 상당 작품이 극작품의 내용과 연결되어 있어서 극작품을 위한 자료 내지는 부차적 텍스트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뮐러의 산문에 대해 그동안 전혀 언급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의 자전적 산문인 <아버지>(1958)와 <사망 신고>(1975)는 극작품의 중심 주제인 역사 속의 폭력과 배반, 죽음, 그리고 저항과 관련해 빈번하게 인용되었고, 마지막 산문인 <꿈 텍스트 1995년 10월>(1995)에 대한 주관적 논평이라 할 에세이 한 권이 1996년에 출간되었다. 뮐러의 산문은 주어캄프 출판사가 1998년부터 2008년까지 12권으로 된 뮐러의 전집을 간행하면서 비로소 한자리에 모였다. 전집 중 제2권인 산문 편에는 21편의 유고를 비롯해 모두 54편의 산문이 실려 있다. 이 산문집의 발간으로 뮐러의 산문 연구를 위한 기본 자료가 정리된 셈이다.
하이너 뮐러의 사유와 극 쓰기 방식은 극단적이다. 그의 의식의 흐름은 고통을 수반하면서 때로는 악몽으로 때로는 전혀 비논리적인 환상의 세계로 이어진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뮐러의 시각에서 보자면 역사는 발전의 움직임을 멈춘 채 응고되어 있고 인간은 사유의 능력을 상실한 채 현재의 순간에 점령당해 있다. 모든 것이 석화해 있다. 뮐러는 이러한 현재 상황을 부수는 작업에 몰두한다. 새로운 것으로 전이, 새로운 역사의 움직임을 태동시키려는 그의 노력은 굳어 있는 모든 것들을 파괴하는 과정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가 만들어 내는 장면들은 극단적인 난폭성, 테러와 같은 공격으로 채워지고 압축된 언어는 수수께끼와 같은 암호와 상징, 은유로 덮여 있다. 뮐러는 모든 기존의 틀을 그 기초부터 흔들어 놓는다. “경악시키기의 요구”로 규정되는 그의 연극 텍스트는 이를 위한 수단이다. 기존의 틀에 갇혀 있는 독자와 관객에게 그 틀을 부수고 나올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기 위해 필요한 것은 “경악을 통한 교육” 그리고 “경악을 통해 배우기”다.
문학이 해야 할 일은 역사와 상황 그리고 인간 두려움의 중심을 찾아내 그것을 독자, 관객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두려움의 중심을 은폐하거나 덮어 두면 거기에서 얻을 수 있는 에너지에 접근할 수가 없다. 두려움과 대결을 통한 극복이 필요하다. 뮐러의 연극 텍스트가 갖고 있는 경악의 요소는 관객을 심리적 압박 아래 두고 어떠한 반응을 일으키도록 강요한다. 관객의 경악이 그 작품 자체를 향하고, 최소한 방어 반응으로서 어떤 저항감을 가지고 극장을 떠나게 되면 이미 새로운 경험과 기억이 그의 의식 속에 자리하게 되는 것이다. 뮐러는 관객의 이러한 경험이 그들의 실제 생활을 변화하도록 작용하기를 기대한다. 모든 것에 무감각해져 있는 현대인의 의식과 고정 관념의 틀을 깨기 위한 ‘경악시키기’의 표현 형식은 파괴로 이어진다. 뮐러에게 파괴는 건설적, 생산적 힘을 갖는다.
200자평
브레히트 이후 가장 의미 있는 독일어권 극작가’, ‘동독의 가장 중요한 작가’ 하이너 뮐러. 그러나 정작 동독에서는 오랫동안 출판과 공연이 중지되었다. 동독 사회 내부의 모순과 갈등을 직시했기 때문이다. 그의 산문을 국내 최초로 소개한다. 난해할 정도로 자유로운 사고와 독특한 표현 방식은 경악을 통해 독자의 ‘틀’을 깨고 새로움을 창조한다.
지은이
하이너 뮐러는 구 동독 출신으로 동독에서보다는 서구 연극계에서 더욱 주목받은 특이한 극작가에 속한다. 그의 생애를 살펴볼 때, 본격적인 작업을 시작한 1950년대 이후 사망에 이르기까지 그의 도정은 비난과 오해 그리고 찬사가 한꺼번에 뒤섞인 모순의 과정이었다. 동독 문화 정책과 마찰을 빚은 데 따른 출판과 공연 금지의 역경에서부터 독일 통일 이후 이미 저명인사가 된 그에게 가해진 동독국가보위부(슈타지) 가담 전력에 대한 비난에 이르기까지 그는 계속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양 독일에서는 그의 문학을 중요하게 평하는 글들이 쏟아져 나왔고, 1990년에는 프랑크푸르트 연극제 ‘엑스페리멘타 6’(1990. 5. 19∼1990. 6. 4)이 그에게 헌정되었다. 겉으로 드러나는 이 같은 현상은 이 작가에 대한 명확한 평가를 어렵게 만드는 것이긴 하나, 다른 한편으로는 독일 문단에서 그의 특수한 위치를 암시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옮긴이
정민영은 한국외국어대학교 독일어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독문학박사) 독일 뷔르츠부르크대학에서 현대독일문학을 수학했다. 2013년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독일어과 교수다. 2002년부터 여러 연극인들과 희곡낭독공연회를 결성해 번역과 낭독 공연을 통해 여러 나라의 동시대 희곡을 소개하고 있다. 저서로 ≪카바레. 자유와 웃음의 공연예술≫, ≪하이너 뮐러 극작론≫, ≪하이너 뮐러의 연극세계≫(공저), ≪하이너 뮐러 연구≫(공저) 등이 있고 번역한 책으로 ≪뮐러 산문선≫, ≪하이너 뮐러 평전≫, 카를 발렌틴 선집 ≪변두리 극장≫, 탕크레트 도르스트의 ≪검은 윤곽≫, 엘프리데 옐리네크의 ≪욕망≫, 욘 포세 희곡집 ≪가을날의 꿈≫, 욘 포세의 ≪이름/기타맨≫, 우르스 비드머의 ≪정상의 개들≫, 볼프강 바우어의 ≪찬란한 오후≫, 독일어 번역인 정진규 시선집 ≪Tanz der Worte(말씀의 춤)≫ 등이 있다. 그 밖에 <독일어권 카바레 연구 1, 2>, <전략적 표현 기법으로서의 추>, <예술로서의 대중오락?카를 발렌틴의 희극성>, <하이너 뮐러의 산문>, <한국 무대의 하이너 뮐러>, <Zur Rezeption der DDR-Literatur in Südkorea> 등 많은 논문을 썼다. 주요 드라마투르기 작품으로 손정우가 연출한 <그림쓰기>, 백은아가 연출한 <찬란한 오후>, <보이첵-마리를 죽인 남자>, 송선호가 연출한 <가을날의 꿈>, 홀거 테슈케가 연출한 <서푼짜리 오페라> 등이 있다.
차례
할아버지에 대한 보고
위대한 관 판매상의 파산
기이한 행진
사랑 이야기
농부들은 채석장을 등지고 섰다
푸줏간 주인과 아내
철십자 훈장
아버지
야경화
헤라클레스 2 또는 히드라
사망 신고
나는 어느 발코니에 앉아
트라키아의 여름
꿈 텍스트. 연출가들의 밤
꿈 텍스트 1995년 10월
해설
지은이에 대해
지은이 연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그는 많은 사람들 속으로 시선을 돌렸다. 가까이에는 옷을 잘 차려입은 중년의 남자가 여자와 아이와 함께 서 있었다. 여자는 쇼핑백을 들고 있었고, 다른 쪽 겨드랑이엔 종이로 포장된 전기스탠드를 끼고 있었다. 남자의 양손은 비어 있었다. 아이는 여자 뒤에 바싹 붙어 서서 남자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남자와 여자는 서로 쳐다보지도 않은 채 말다툼을 했다. 아이가 뭐라고 말했다. 남자가 아이의 손을 잡아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여자는 아이를 자기 뒤로 끌어당기고는 쇼핑백을 남자를 향해 휘둘러 댔다. 왜 저들은 아이를 나누어 가지지 못할까, 대학생은 생각했다. 남자는 오른쪽 반을, 여자는 왼쪽 반을 가지고 서로 헤어져 걸어가는 장면을 상상하자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아이가 사람들 속으로 뛰어갔다. 남자는 여자에게 아이가 뛰어가 버렸다고 일러 주면서도 자기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여자가 놀라 아이를 뒤쫓아 뛰었다. 어째서 넌 나와 결혼하려 하지 않는 거지? 대학생이 물었다. 아가씨는 대답하지 않았고, 기차가 오자 그에게 악수를 청하고는 기차에 올랐다. 그는 그녀를 따라가려고 했을 때, 금연칸이라고 쓴 표지판을 보았다. 다음 칸으로 갔다. 그는 마치 자신이 시험에 불합격한 것 같았고, 배웠던 것을 다시 한 번 배워야만 할 것 같았다.